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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강릉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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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계시는 오죽헌에 왔다. 

 

오죽헌은 조선 중종 때 건축 된 곳으로 한국 주택 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조선 중기 목조 건물이다.

 

오죽헌은 덕이 높고 마음이 어진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외가인 : 강릉 북평촌)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신사임당은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여범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신사임당은 19세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덕수 이씨 이원수와 결혼하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이이는 어머니를 닮았는지 3~4세 때부터 글을 배워 13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이이가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 보낸 이이는 큰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이이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 초막을 세우고 3년 상을 치런 뒤,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와 노장사상을 연구 했으나 성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바른일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삶이라 깨닫고 금강산을 내려와 강릉으로 돌아온다.

 

 우리도 율곡 이이의 발자취를 따라 오죽헌로 향했다. 주차장은 차를 세울데도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들어가니 율곡 선생님이 계셨다.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율곡 이이가 있다. 손을 잡아본다.

 

율곡 이이 선생님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 이곳 오죽헌 몽룡실에서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세살에 말과 글을 익혀 열살에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열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간 시묘한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 하였다. 스물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마음을 비우고, 잠시 이이의 사상을 생각해 보았다.

 

교육자이자 철학자 이신 선생은 백성을 근본으로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언봉사>를 지어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동호문답>과 <성학집요>를 지어 군왕의 도를 개진하였다.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군사 십만명을 양성 할것을 주장 하였으며, 향약을 제정하여 지방 자치제를 장려하고 사창제도를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이이는 47세에 자신의 사상을 담은 "성학집요"를 편찬하는데 간단히 살펴보면,

자연이 변해가는 것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이 앞서지만 점점 욕심이 섞인 마음도 생기는데, 이는 교육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이는 정계를 떠난 후에는 고산구곡에 은병정사를 세우고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때 <격몽요걸>과 <학교모범>을 저술하였다.

1584년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났으며, 40년뒤 1624년 인조 대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이는 살아 계실 때 얼마나 검소하고 바르게 사셨는지,

 

수 많은 상소문을 써서 정치, 경제 국방, 교육 등에 꼭 필요한 생각을 제시 하기도 하고 많은 업적을 남기셨지만, 장례식 때 돈이 없어서 여러 사람들이 모은 돈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받은 학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

 

* 왼쪽은 이영애의 핸드프린팅이다.

 

이영애가 강릉에 전하는 메세지로 

 

아름다운 강릉 ~ 

영원 하길

빌어요

 

극중배역 : 신사임당, 서지윤

 

* 오른쪽은 송승헌의 핸드프린팅이다.

 

승승헌이 강릉에 전하는 메세지다.

 

역사의 고장 

강릉에서 

찰영 잘하고 가요!

 

극중배역 : 이겸

 

오죽헌 안내도 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세계 최초 모자 화폐인물탄생지 이정표를 지나서 넓고, 멋지고, 편안한 오죽헌을 돌아 보면서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인성교육과 가정생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본다. 

 

율곡선생 유적정화 기념비

 

율곡 인성교육관

 

안채, 사랑채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 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다가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 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공간이고,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쳐하는 공간이다.

사랑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신사임당이 서울 시집에 있을 때  고향에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시입니다.

 

어머니를 그리며

 

산 첩첩 내고향 여기서 천리

꿈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 뿐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 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꼬

 

그림과 같은 고향 강릉의 전경을 떠 올리며, '언제 또 다시 색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 수 있을까!'라고 애틋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그렸습니다.

 

<겨레의 어머니 겨레 스승> 효녀로서의 사임당에서 

 

어제각

 

어제각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 어린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본관하기 위하여 지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궁궐로 가져오게 하여 친히 보았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 어제각이다. 

 

<격몽요결> 거가장에서

 

집에 있을 때는 예법을 지켜 집안식구들을 

거느려야하며, 각자의 직분에 맞도록 알맞은

일을 나누어 알뜰히 해 나가도록 보살펴야합니다.

 

씀씀이를 먼저 정하여 두었다가

살림의 정도를 보아가며 지출하고,

위 아래 사람들의 의식과 길흉의 비용은 

정해진바에 따라 고르게 해야합니다.

 

특히

낭비를 줄이고 사치를 막아 조금씩 저축으로 

여유를 만들어 놓아야,

뜻밖의 일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형제는 부모에게 똑같이 몸을 물려받았으니

나와는 한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고 나는 나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되며,

음식과 의복은 있고 없는데로 모두 함께 해야 합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를 직접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벼루 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며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 하도록 하였습니다. 

 

어명으로 지었다고 해서 어제각이라고 부르며 벼루 뒷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 어필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 내어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품이여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 남아 있구려

 

오천원 지폐에 오죽헌과 벼루가 도안 되어 있습니다.

 

율곡선생 행장기

 

사임당 신씨

 

기묘사화 때 난을 면한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의 다섯 딸 가운데 사임당은 둘째 딸로 1504년 음력 10월 29일에 이곳 오죽헌에서 태어나 1551년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8세이다.

 

덕수 이씨 원수에게 출가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고, 우리나라 백세의 스승이라 이르는 율곡은 셋째 아들이다.

 

사임당은 우리 역사에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여성으로 부덕은 만인의 사표가 되었고 천부의 자질이 남달리 비범하여 여공은 말할 것도 없고 글씨, 그림, 학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천재가 발휘된 작품과 업적이 오늘까지 남아 전하여 뒷세상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사임당은 율곡과 같은 거벽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매창과 옥산과 같은 자녀를 두었으니 이들은 다 어머니의 자질과 훈도에 연유하여 서예나 그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남성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을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은 우리 민족의 만세의 여성상이라 이를 것이다.

 

글쓴이 : 최 승 순      세운이 : (사) 율곡학회. 신사임당동상건립추진위원회

만든이 : 최 옥 영      도운이 : 강원도. 강릉시

 

2008년 12월 30일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현숙한 여성 중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자수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림으로는 산수와 포도를 잘 그렸으며, 풀과 벌레 역시 잘 그렸다.

 

특히,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에서는 자연을 허투로 보지 않던 사임당의 심성과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해 내는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을 직접 본 숙종대왕은 '오직 풀이요 벌레거늘 모습이 아주 비슷하구나, 부인이 묘사한 것이 어찌 이처럼 오묘할고.'라는 시를 지었고, 권상하는 '실물과 똑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며 감탄할 정도였다.

 

오죽헌에서는 초충도의 주요 소재인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양귀비, 봉선화, 원추리 등을 심어 화단을 조성하였다.

식물들 주의로 벌, 나비, 잠자리, 여치, 방아깨비, 쇠똥구리와 같은 날벌레와 길벌레가 모여 들면 마치 한 폭의 초충도를 보는 듯하여, 화단의 풍경과 그림을 직접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이 아름다움을 빛내고 ~

 

주차장으로 나오려고하니 벌써 해가 저물고 있다.

하늘은 어둠을 향해서 가고 우리는 신사임당과 율곡을 생각하면서 

 

오만원 속의 신사임당과 오천원속의 율곡을 보면서

 

카페가 있는 거리로 나왔다.

신사임당의 발자취와 자녀 키우는 법을 율곡 이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교육받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go go ~

 

오죽헌은

주소 : 강원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오죽헌

전화 : 033-660-3301 

운영시간 : 09:00 ~ 18:00(입장마감시간 :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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