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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강릉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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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 허난설헌 기념공원에 왔다.

 

조선 중기 시·서·화 삼절을 두루 걸쳐 천재성을 인정 받았던 난설헌 허초희와 학자·문인·정치가이자 '홍길동'의 저자 교산 허균과 함께 당대 뛰어난 시재와 문재를 발휘 하였던 "허씨 오문장"의 문학성을 소개하고 있다. 

두 오누이의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영상자료와 하곡조천기, 광한전백옥구상량문, 난설헌집, 국조시산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의 :  033-640-4798  

관람시간 : 09: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무료관람 

 

전통차 체험관인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전통차 체험관   예약 및 문의 : 033-640-4466  

체험시간 : 10:00 ~ 17:00 

매주 월요일 휴관   

 

허균 · 허초희의 집

 

강릉 바닷가 사천과 이어진 교룡산 정기를 타고난 허균<1569 ~ 1618 자 : 단보 호 : 교산 성수>과 난초향과 눈처럼 깨끗한 성품을 지닌 허초희<1563 ~ 1589 호 : 허난설헌 별호 : 경번>는 문향 강릉이 낳은 오누이 문인이다.

 

매천 황현은 이들과 허봉을 가리켜 "초당 가문에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 제일의 신선 재주는 경번에 속하였네"라고 찬국조제가시에서 칭송을 하였는데 특히 그중 난설헌의 글재주가 가장 돋보여 신선재주를 닮았다고 하였다.

오누이는 아버지 허엽과 장남 허성 그리고 허봉과 함께 허씨 5문장가를 이루어 글 잘 짓고 학문하는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강릉 땅 초당에서 살면서 경포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탐승하며 시를 읆고 문학성을 키워 나간다. 

 

특히,

막내 허균의 시 "경포대를 그리워하며" 에서 "내집은 경포호의 서쪽에 있으니 바위돌 골짜기들이 화계명산과 같아라"라고하는 등 여러 작품을 통해 강릉에 대한 애착을 표현 했다.

 

<매천 황현의 찬국조제가시 중에서 ..... >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다.

 

허균 · 허난설헌 기념관 설립목적

 

본 기념관은 강릉이 배출한 조선 중기 시·서·화 삼절을 두루 걸쳐 그 천재성을 인정 받던 여류작가 난설헌 허초희와 문학가이며 자유사상가인 교산 허균의 개혁·평등·민본 사상을 선양하고 난설헌집, 홍길동전 등을 비롯하여 허씨오문장의 이야기와 문학 자료를 수집, 전시함으로써 문향 강릉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건립되었습니다.

 

허씨 5문장과 강릉

 

강원도 강릉 양천 허씨의 명문가에서 아버지 초당 허엽과 김씨 부인 사이에 세 자녀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은 첫째 한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악록 허성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 불렸다.

이들 허씨 5문장은 우리 문학사에서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있다.

이들에게 강릉은 고향이자, 문학의 터전이며, 안식처였다.

개혁가이자 자유인이었던 허균이 관직에서 멀어지거나 어머니가 그리울 때 찾아온 땅이자,

조선 최고 여류시인이었던 허난설헌에게 문학적 향기를 불어 넣어주던 곳도 역시 강릉이다.

강원도 강릉 초당동에 허씨 5문장을 기리기 위해 "허씨 5문장시비"가 세워져 있다.

 

남존여비 : 남자를 존대하고 여자를 천하게 여기다.

 

16세기 말 조선시대는 남존여비가 엄밀히 존재하던 사회로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면서 강력한 남성중심의 사관과 함께 부계적 가족제도인 종법제도가 확립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 제도 아래서의 여성은 삼종지도라 하여 남성들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적지위는 암울하고 미래가 없는 상태였으며, 국문소설을 읽고, 규방가사나 지으며 일생을 바쳐야했다. 따라서 허난설헌이 살았던 시대는 여성의 예속과 자신들의 처지를 깊이 인식하고 한탄과 분노로 가슴을 저미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녀는 인습의 굴레 속에서 자아를 구현한 예술가이자, 문학인이었다.

 

불여세합 : 세상과 더불어 화합하지 못한다. 

 

적서자별 : 정실 자식과 첩의 자식을 차별하다.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봉건적 사회제도로 서얼 출신은 호부호형 금지, 과거 응시 자격박탈 등 적서차별 제도가 있었다. 

허균은 적자 출신이지만 당시 조선시대 체제의 모순에 근본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허균 주변에는 서얼 출신의 스승 손곡 이달과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얼 출신이나 천민 등이 지닌 재능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 했으며, 그만큼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차별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적서차별의 신분 모순과 백성들의 황폐한 삶, 당쟁 등에 대한 허균의 비판적인식은 그의 수많은 시 작품과 <호민론>, <유재론>과 같은 산문, <홍길동전>같은 한글소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적서차별 타파를 부르짖던 비운의 혁명가 허균,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표준이나 중심을 거부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자유와 개혁의 모습이 있으며, 세상은 아직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숭유억불 : : 유교를 받아 들이고, 불교를 억압하다.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왕도정치를의 실현을 천명하으로써 역성 혁명을 이룩하고, 그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유교, 즉 성리학 외에 다른 학문이나 사상이 설 자리가 없었다. 젊었을 때부터 경전을 읽고, 스님들과 교류한 허균은 서산대사나 사명대사와는 친밀한 사이였다.

 

숭유억불 정책이 펼쳐지던 시대, 허균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고, 사림들에게 지탄을 받았다. 또한 그는 불교뿐 아니라 도교, 양명학, 서학 등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자신의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이렇게 허균은 통념적 도덕에 굴종하기 보다는 본성과 감정이 요구하는데로 자기 방식의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경번 허난설헌

 

난설헌의 이름은 초희, 자는 경번이다. 경번은 난설헌이 중국의 여신선 인 번부인을 사모하여 지은것이라고 하며, 난설헌 호는 난초의 청순함과 눈의 깨끗한 이미지를 따라서 지은것이다.

 

교산 허균

 

허균은 호를 교산이라 하였다. 사천 바닷가 바위 밑바닥에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바위가 두 동강 나면서 문처럼 구멍이 뚫려 교문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8년 뒤에 허균이 태어났으므로 그 뒷산 이름을 따서 호를 교산이라고 지었다.

 

무수한 꽃이 한 줄기 두 줄기에 피어있네

다시 만평의 밭에 심으니 또한 참으로 향기롭네 

정미년 중하 (한여름)상완일에 무학산 아래서

고요히 좌정하고 관해도인 쓰다.

 

작가 미상  

허우진 소장  

 

자유인 허균

 

- 잦은 파직과 득세 그리고 의문의 파국 -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일레라 ...

내 분수 벼슬과는 벌써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하랴,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그대들은 그대들 법이나 써라.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

 

 <문파관작> 중              

 

기념관 옆
허난설헌을 보기위해서 몇번이나 오려고 했는데 못오고 이제야 겨우왔다. 소원을 푼 느낌이다.

비석에는 여러 문장들이 

 

비석에 있는 시를 찍어 보았다.

 

죽지시 3

 

난설헌 허초희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돗단배 매어 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

 

장청룡 역           

 

난하에서

 

하곡 허 봉         

 

고죽성 마루에 달 떠 오르려 하니

난하 서쪽 성에 종소리 들리어라

조각배로 건너지 못해 해안가 찾으니

수목이 푸르게 덮힌 곳 옛북평이구나

 

장정룡 역         

 

정원 뒤 숲에는 휴식공간이 있어 쉴 수가 있었다.

 

이정표가 보이고

 

강릉 초당 고택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   

 

강릉 초당 고택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인 허난설헌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져 있다.

현재 가옥의 모습은 1912년 초계 정씨의 후손인 정호경이 가옥을 늘리고 고쳐 지으면서 갖추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로 배치되어 있으며, 바깥과 구분하는 담이 있다.

대문간채와 직접 연결된 넓은 마당이 있는 사랑채는 안채의 건너편에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안채와 연결 된다.

사랑채는 전면 5칸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랑채 옆에는 사랑 마당과 구분하는 담을 안팍으로 쌓아서 안채에서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넓은 부억과 방, 대청마루로 구성 되어 잇으며, 우물칸과 방앗간 옆으로 협문을 두어 여자들이 출입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안채 뒤의 후원과 사랑채 앞쪽의 사랑 마당에 있는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잇으며 한국 정통의 정원 형태가 잘 나타나 있다.

고택 주변의 소나무 숲은 전통적인 한옥의 멋을 더해 준다.    

 

 

우물터가 있고,

 

우물을 돌아서 주차장으로 오면서 아쉬움과 함께 조선중기 시·서·화 삼절을 두루 걸쳐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허난설헌과 학자·문인·정치가이자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의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전시작품들을 관람하면서 고전문학의 향기에 취해본다.

 

주소 : 강릉시 난설헌로 193번길 1-29

전화 : 033-640-4798

문의 : 강릉시 문화예술과 033-640-5580

예약 : 문화관광해설사 033-640-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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